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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여자가 명절이 두려운 이유, 다만 고된 노동 때문만은 아니다.

내일이면 설 연휴가 시작된다.  결혼 전에는 긴 연휴인 명절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명절이 다가올 때면 마음이 심란하여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명절 증후군이 이제 나에게도 해당되는 단어가 된 것이다.


결혼 첫 번째 맞은 명절이 생각난다.  12월에 결혼 한 나는 첫 번째 맞은 명절은 설이었다.  명절이 힘들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래서인지 명절 음식 준비를 끝내놓고  시어머니께 ‘벌써 다 했어요?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29년 동안 명절을 함께 보낸 가족들과 떨어져 보낸다는 건..


당시, ‘이 정도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날 저녁이 되니 갑자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엄마, 아버지, 동생들과 다른 공간에서 명절을 보내야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이다. 


29년 동안 명절을 함께 보내왔었는데, 결혼식과 더불어 나의 가족들은 전화로만 인사를 나누고 남편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순간 어색하게 느껴졌고, 갑자기 부모님들이 보고 싶어져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시부모님과 쌓은 정이 깊어져 이 분들도 나의 가족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다.  결혼 초에는 알고 지낸지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어렵게만 느껴졌고 나의 가족이라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를 비난할진 모르겠지만, 이건 너무도 한치의 거름없는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장담컨대 이 시대의 며느리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그 날 밤 애궂은 신랑에게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설 당일, 정말 몰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시댁 집안은 어른들이 정정하시다. 


우리 시아버님은 아직까지 발언권조차 없으시다. 시조부모님과 그 대에 어른들이 모두 계시고 당숙과 숙모님들 그리고 ‘래’자 돌림(신랑은 함안 조. ‘래’자 항렬을 쓰고 있다.)의 도련님과 아가씨들... 어림짐작 60명은 넘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모시는 풍경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새색시가 어찌 그런 발칙한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차례를 모시고 나서 식사를 하는데 큰 상들이 몇 개나 차려졌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설거지 거리가 남았다.


당시, 설거지를 맡게 되었는데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경험을 했다. 빨리 빨리 끝내놓고 친정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걸 눈치 챈 신랑이 급히 서두르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성묘도 가고, 어른들께 인사도 드린 후 친정에 가기위해 차에 올랐다.  그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너무 힘들었기에 나왔던 눈물이었고, 매년 명절을 이렇게 엄마, 아버지와 보낼 수 없겠다는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신랑은 무척 당황해 했고 우리 신랑의 특기인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친정에 가서는 정말 멋진 시간을 보냈다.  올 때까지 식사도 안하시고 기다리고 계셨고, 혹시나 내가 실수했을까봐 엄마, 아버지께선 오전 내내 안절부절이셨다는 말도 전해주셨다. 그 마음이 전해져 짠하게 감동이 밀려왔고 정말 마음 편하게 많은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수상한 삼형제의 어영이 왜 비난 받아야 하는가?


얼마 전, 드라마 ‘수상한 삼형제’ 어영의 명절 제사 발언으로 논란이 된 적 있었다. 어영이라는 배역의 설정은 홀아버지의 장녀로 철없는 여동생이 있다. 결혼하고 첫 명절을 보내는 어영은 여동생마저 가출하여 아버지 혼자서 차례를 모시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정 차례를 모시고 싶어하고 시댁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일 핑계로 따돌린다.



시댁에 가야한다는 남편의 말에 어영은 ‘내가 왜 우리 집 차례를 걷어치우고 자기네 집에 가야하냐’고 대답한다.  이러한 어영의 태도에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이기적이라며 비난이 쏟아졌다.


개인적으로 어영의 태도가 충분히 공감된다.  나 또한 어영의 상황이라면 그런 마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막장이니 뭐니 하며 문제시 삼고 있다.  시댁에서 차례를 모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드라마의 내용도 잘 모르고, 기사 검색을 통해 본 이 드라마는 막장이라 칭할 만한 부분도 많았다는 건 인정한다.)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안타깝기만 하다. 나의 상황은 친정 쪽에 식구도 많고, 시댁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차례 모시고 바로 친정으로 갈 수 있어 큰 불만은 없다.  하지만, 만약 내가 차례를 친정에서 모시고 시댁에서 나머지 명절을 보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시댁, 친정 구분 없이 상황에 따라 명절을 보낼 수 있는 문화가 만들어졌음 하는  바람이다.  기계적인 평등을 이야기한다고 비난 받을 수 있으나 이미 남녀 구분이 없어지고 양성평등이라는 가치가 소통되는 사회라면 제사와 명절 문화도 그에 맞게 바뀌어야 되지 않을까?


고된 일 때문에 명절이 싫지만, 그에 못지않게 명절을 보내는 시댁, 친정에 대한 구분된 인식이 더욱더 힘들게 만든다.  나의 경우 시댁 분위기가 운 좋게도 남녀 구분 없이 명절음식을 만들고, 친정에 가는 시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 빠른 편임을 밝힌다. (물론, 대가족의 설거지는 여자의 몫이지만..)